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수壽’는 숫자가 아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응답이다. 고일민 작가의 '수壽'는 이 한 글자를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생명의 합창으로 풀어낸다. 작품 속 ‘壽’자는 더 이상 문자에 머물지 않는다. 글자의 획마다 물결이 흐르고, 물고기가 헤엄치며, 거북이 천천히 시간을 건넌다. 꽃은 피고 새는 깃을 고른다. 이 모든 생명은 각자의 속도로 존재하지만,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장수는 단일한 힘이 아니라 공존의 결과임을 이 작품은 조용히 말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수’의 구조를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그 내부에 우주를 담았다는 점이다. 파도는 생의 역동을, 거북은 인내와 지속을, 물고기는 번성과 순환을 상징한다. 여기에 꽃과 과실, 새의 형상이 더해지며 ‘살아 있음’의 결이 촘촘해진다. 장수는 정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관계 맺기라는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색채 역시 과시적이지 않다. 검은 바탕은 깊이를 만들고, 그 위에 얹힌 색들은 각자의 몫만큼 빛난다. 이는 오래 산다는 것이 요란한 성취의 나열이 아니라, 차분한 누적임을 환기한다. 세월은 소리 없이 쌓이고, 그 위에 생은 단단해진
K-민화 이존영 기자 | 반차도는 행렬의 그림이지만, 실은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을 그린 지도다. 김선희 작가 의 '왕조 왕세자 책례반차도권'은 화려한 의식의 기록을 넘어, 한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를 정렬하는지를 또렷이 보여준다. 이 긴 두루마리 속에서 주인공은 단 한 사람이 아니다. 깃발과 의장, 악기와 기물, 보폭을 맞춘 사람들 하나하나가 주체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속도, 역할을 넘지 않는 선, 그 절제가 이 행렬의 품격을 만든다. 책례는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공동체가 합의한 질서의 확인이다. 김선희 작가는 반차도의 미덕인 ‘거리감’을 정확히 살린다. 인물들은 작게 그려지지만, 관계는 크게 보인다. 왕세자의 자리는 중앙이되 과장되지 않고, 의장물은 권위를 드러내되 폭력적이지 않다. 이 그림에서 힘은 소리치지 않는다. 정확히 제자리를 지킬 때 힘은 가장 크다는 사실을 화면이 증명한다. 색채와 배열은 반복을 통해 안정감을 만든다. 같은 옷, 같은 기물, 같은 간격의 행렬은 획일이 아니라 신뢰의 리듬이다.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만 즉위는 정당성을 얻는다. 그래서 이 반차도는 축제가 아니라, 국가의 약속문처럼 읽힌
K-민화 강경희 기자 | 이 k-그라피 작품의 첫 문장은 선언에 가깝다. 「청하淸河를 읽다. 」, 맑음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파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가능성은 조건이 아니라 태도이며, 세상과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임을 글과 획으로 증명해 보인다. “사람은 맑은 사람에게 끌리고, 바람은 맑은 강물로 내려온다.” 작품 속 이 문장은 미문美文이기 이전에 삶의 법칙처럼 읽힌다. 계산과 소음이 가득한 시대일수록, 사람은 더욱 맑은 곳을 향해 이동한다. 권력이나 요란한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 흐르며 낮아지는 존재에게 마음은 끌린다. 성파의 글씨는 바로 그 ‘낮아짐의 힘’을 품고 있다. 이어서 작가는 말한다. “이익을 취함에 스스로 부끄럼 없으니 맑고 세상살이 물처럼 흐르니 이 또한 맑도다.” 여기서 ‘맑음’은 도덕적 완벽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아는 감각, 그리고 집착하지 않고 흘러가는 태도가 맑음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오늘의 사회를 향한 조용하지만 분명한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취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는 어디까지 흐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단에 병기된 한문 구절은 작품의 정신을 더욱 단단히 붙든다. 人濁爲引以淸心
K-민화 이성준 기자 | 우리는 묻지 않는다. 이것이 글씨인가, 그림인가를. 우리는 선언한다. 이것은 문화다. 1. K는 국기(國旗)다. K는 알파벳의 한 글자가 아니다. K는 한국이라는 시간의 축적이며, 역사·정신·손의 기억이 응축된 상징이다. K는 더 이상 수식어가 아니다. K는 중심이며, 출발점이며, 세계와 마주하는 한국의 얼굴이다. 우리는 K를 앞에 둔다. 그것은 자부심이 아니라 책임이기 때문이다. Graphy는 언어다. Graphy는 쓰는 행위가 아니다. Graphy는 사유가 선으로 드러나는 방식이다. 문자 이전의 선, 말보다 먼저 태어난 형상, 인간이 생각을 남겨온 가장 오래된 언어, 그리고 Graphy는 기록이 아니라 표현이며, 정보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이다. K-Graphy는 문화 선언이다. K-Graphy는 장르가 아니다. K-Graphy는 기법이 아니다. K-Graphy는 스타일이 아니다. K-Graphy는 한국적 사유와 손의 언어가 결합된 문화 선언이다. 우리는 글과 그림을 나누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를 묻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이 선에 정신이 있는가. 이 획에 시대가 담겨 있는가. K-그라피는 모두를 포괄한다. 대나무 붓으로 쓰는 죽
K-민화 이존영 기자 | '태평성시도'는 조용히 묻는다. “태평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그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사람이 있다. 땀 흘리는 사람, 웃는 사람, 다투는 사람, 건너는 사람, 나르는 사람. 송정혜 작가의 '태평성시도'는 ‘이상 국가’가 아니라 ‘작동하는 사회’를 그린 그림이다. 태평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과 관계가 쌓여 만들어지는 풍경임을 이 그림은 말한다. 화면은 빽빽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다리는 제 역할을 하고, 물은 흐르며, 장터는 소란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이 질서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생활이 있다. 민화적 시선은 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같은 눈높이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협력의 장면들’이다. 통나무를 나르는 손, 다리 아래서 물을 가르는 몸, 장터에서 음식을 나누는 얼굴들. 태평은 정적靜的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율되는 역동적 균형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평화롭지만 정지돼 있지 않다. K-민화는 전통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전통을 다시 사용한다. '태평성시도'는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K-민화 이존영 기자 | 칸초아리나는 벨라루스에서 온 유학생으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K-민화를 익히고 배우며 전통 회화가 지닌 상징과 정신성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흡수해 온 작가다. 그가 그린 k-민화는 늘 큰 것을 그리면서도, 진실은 작은 곳에 숨겨왔다. '도마뱀 나들이'는 그 전통을 가장 섬세한 방식으로 이어간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위엄도 상징도 아닌, 일상 속의 작은 생명이다. 그러나 이 작음은 미약함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는 정확한 비중으로 제시된다. 괴석 위에 올라선 도마뱀의 자세는 느긋하고 단정하다. 포식도 도주도 아닌, 관찰의 태도다. 눈은 크게 열려 있으되 공격적이지 않고, 몸은 길게 늘어졌으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 안정감은 자연과의 거리 조절에서 나온다. 도마뱀은 바위를 정복하지도, 꽃을 짓밟지도 않는다. 그저 그 사이에 정확히 놓여 있다. 괴석의 절단된 면과 그 틈에서 피어난 꽃들은 대비를 이룬다. 거침과 부드러움, 무게와 향기. 그러나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증명한다. 상처 난 돌이 있어 꽃이 더 선명해지고, 꽃의 존재로 돌의 거칠음이 의미를 얻는다. 이는 자연의 윤리와 공존은 타협이 아니라 배치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K-민화 이존영 기자 |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에 놓인 그림이었지만, 그 본질은 권좌가 아니라 질서의 중심이었다. 이미형 작가의 '황금일월오봉도'는 이 오래된 도상을 ‘황금’이라는 선택으로 다시 세운다. 금빛은 장식이 아니라 선언이다. 흔들리는 시대에 중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다. 검은 바탕 위에 떠오른 원형의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된 우주다. 해와 달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산은 높되 과시하지 않고, 물은 흐르되 넘치지 않는다. 모든 요소는 자기 몫의 자리를 지키며 침묵의 합의를 이룬다. 이 합의가 바로 나라의 기틀이었고, 오늘의 삶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금빛은 ‘부’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의 응축으로 읽힌다. 수없이 겹친 선과 결 위에 올라앉은 금은, 빠른 성취가 아닌 오래 견딘 결과의 색이다. 검은 바탕은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대비가 아니라, 빛이 태어나기까지의 밤이다. 밤을 통과한 빛만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화면은 말없이 증명한다. 원형 구도는 시작과 끝을 지운다. 왕의 자리는 비어 있고, 대신 자연의 순환이 자리를 채운다. 이는 권위의 공백이 아니라, 권위의 재정의다.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작품은 감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마주함을 요구한다. 무속인 아랑이 그려낸 이 푸른 용은 장식적 상징도, 길상의 도상도 아니다. 이는 부름에 응답해 나타난 존재, 다시 말해 주술적 호출의 결과물이다. 작품 속 용은 고요하지 않다. 구름을 가르며 출현한 푸른 비늘의 몸체는 상승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그 움직임에는 긴장과 각성이 동시에 흐른다. 전통 회화에서 용은 왕권과 복을 상징했으나, 아랑의 용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이다. 이 용은 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질서를 흔들고 기운을 전환하는 존재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용의 시선이다.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붉은 구슬을 향해 몸을 틀고 있다. 이 구슬은 흔히 여의주로 해석되지만, 아랑의 세계관에서는 단순한 소망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집중된 기운의 핵, 혹은 인간과 세계를 잇는 매개체에 가깝다. 구슬 주위로 흩어지는 붉은 기운은 축복이 아니라 경고처럼 읽힌다. 다루지 못한 힘은 곧 화火가 된다는 무속적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구름 또한 중요하다. 이 작품에서 구름은 배경이 아니라 장막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사이를 가르는 경계이자, 신령이 드나드는 통로다.
K-민화 이존영 기자 | 해와 달은 원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화는 종종 그것들을 땅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앉힌다. 김정연 작가의 '일월수상도'에서 해와 달은 더 이상 먼 천체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며, 생명의 시간과 호흡을 함께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수壽의 나무’가 서 있다. 깊은 뿌리와 굳건한 몸통은 세월을 견딘 존재의 형상이고, 그 위로 펼쳐진 잎들은 축적된 생의 결과다. 해와 달은 그 위에 겹쳐지며 낮과 밤, 시작과 끝을 나무 한 몸에 포개 놓는다. 이는 장수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환의 완성임을 말한다. 상단을 채우는 오방색 구름은 역동적이되 과하지 않다. 구름은 흐르며 바뀌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의 균형이 화면 전체를 지탱한다. 산은 낮고 반복되며, 물결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모든 요소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세계는 소란 없이 오래 간다. 김정연 작가의 색은 선명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강렬한 원형의 해와 달은 시선을 붙잡되, 나무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중심은 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장수를 숫자로 계산한다. 그러나 '일월수상도'는
K-민화 이성준 기자 | 박소현 작가의 이 작품 앞에 서면, 우리는 설명보다 먼저 상태에 들어선다. 차갑고, 깊고, 말이 없는 상태. 이 작품은 감정을 설득하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잠기게 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청록의 번짐은 풍경이 아니라 마음의 온도다. 파도도, 수평선도 없다. 그럼에도 분명히 이것은 바다다. 왜냐하면 바다는 늘 이렇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형상이 아니라, 감정으로. 작품 중앙을 가르는 굵은 필획. “겨울바다.” 이 글자는 제목이면서 동시에 버팀목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더 깊이 내려간 한 줄의 중심. 그 아래 이어지는 문장은 시가 아니라 고백에 가깝다.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일 때 얼마나 좋을까 누구도 겨울바다 속으로 침몰해버리면 내 쓸모없는 생각들이 모두...? 여기서 문장은 끝나지 않는다. 일부러 끝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독자가 자신의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소현 작가의 K-그라피는 글씨를 통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버리게 만드는 글씨다. 읽다 보면 뜻을 이해하기보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기억이 올라온다. 용서하지 못했던 순간, 붙잡고 있었던 생각, 차갑게 식히지 못한 감정들... 겨울바다는